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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운령(雲嶺) 님의.. "<무소유>, 무소유라 했건만.......!" 입니다~!
    ◆ 청취자세상/┗⌒좋은글과 음악 2010. 3. 29. 05:21

    운령(雲嶺) 님의.. "<무소유>, 무소유라 했건만.......!" 입니다~!

     

     



    오랜만에 찾아온 여동생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화제는 법정(法頂) 스님의 <무소유>에까지 이르렀다.

    골치 아픈 무소유의 철학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이름의 책에 대한 얘기다.

      “오빠, 지금 <무소유> 한 권에 20만 원까지 한 대!

       난 그래도 15년 전에 본 책이 그대로 있으니 이젠 보물이지, 뭐.”

    얘긴즉슨, 법정 스님이 유언으로 자신의 책을 발간하지 말라 하자

    서점에는 법정 스님의 저서가 연일 베스트셀러 1위의 코너에 놓이고

    특히 무소유는 인터넷에서 매일 다른 값으로 뛰어 오른다 한다.


    세상에 이런 기막힌 일이!

    법정 스님이 적멸(寂滅) 속에서도 혀를 차지나 않을까?

    그만큼 무소유를 강조하고 비우라 했건만

    그의 삶과 철학을 본받으려는 어떤 움직임도 없이

    그저 그의 책을 소유하기 위해 떠들썩하다니!


    어려서 초등학교밖에 못 하고 도시 공장으로 돈 벌러 갔던 여동생이

    결혼한 주부로 틈틈이 독학하여 대학까지 졸업하고

    지금은 오십 넘은 나이로 33평 아파트에서

    문화센터의 문학 강좌 들으며 시인 한 번 되겠다는, 평범한 주부로서

    <무소유> 한 권을 보물이라 했다 하여 그녀를 탓할 생각은 없다.

    그 아이가 공장에 다닐 때, 나는 대학을 다니고 있었고

    피눈물 흘리며 산 그 아이가, 비싼 돈 주고 사겠다고 설치는 것도 아니고

    그만한 보물 하나 가졌다 자랑하는 거야 무어라 하랴!


    그러나 세상의 알 만한 사람들이 무소유를 운운할 것이고

    그리고 그 책을 소유하고 싶어 할 것이다.

    그 책이 무엇이며, 무소유가 무엇인가?


    <무소유>는 무슨 사상서도 아니고, 그냥 일상의 신변잡사 이야기이다.

    30여 편 남짓한 글의 제목 중 하나가 “무소유”이다.

    또, 무소유(無所有, simatiga)란,

    가진 것 없이 번뇌의 범위를 넘어 존재하는 상태를 뜻하는 불교용어이다.


    잡다한 신변 이야기에 불과 몇 편의 철학을 언급한 책인데,

    내가 대학 초년생이던 그 해 76년,

    막 출간되자 말자 읽고는 무릎을 치며 가슴을 적시던 책,

    그 후로 법정이란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고

    수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은 이유는 무엇인가?


    종교인이면서 세상적인 고뇌를 잔잔히 털어놓았고

    온갖 어려운 개념의 잔치나 벌이는 철학자나 고승의 흉내를 내지 않았고

    우리는 못 하는, 아름다운 세상을 펼쳐보였기 때문이며

    수많은 위선자로 가득한 세상에서 참 맑게 살아간 진실 때문이다.


    법정 스님이, 그만한 삶에의 의지와 세상에 대한 호소를 하는 분이었다면

    그가 만일 세속에서 정치나 사업에 몸을 담았더라면

    일찌감치 국회의원이나 기업 사장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산으로 들어가, 오직 비우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한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


    법정이 우리에게 커다란 울림이 된 까닭은, 가식(假飾) 없이 산 삶에 있다.

    그는 하늘에서 내려온 도인이 아니라

    박재철이라는 세속적 이름을 가졌던 한 인간이며 

    정말 이론적 무소유대로 완전히 비우고 살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현대 사회에서 보기 드문, 진실한 삶을 살았다.


    그가, 평생을 깨달음을 얻기 위해 걸은 구도의 경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그는 깊은 산속에 면벽하고 수도하는 선승(禪僧)도 아니었고

    우리네 일상 근처에서 사회에 참여를 하고 있었던,

    어쩌면 무소유가 아니라 간절한 바람이 있었던 사람이다.

    무소유란, 쉽게 이해하기로 하면 욕심을 버리는 것이요,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마음 비우라는 말은, 요즘 중학생도 얼마든지 쉽게 쓴다.


    다만, 우리는 그 말을 실천하지 못 하고 사는데

    법정은 인생을 그렇게 살았다.

    아니, 그도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사는 데 훨씬 가까이 다가갔다.


    아무리 냉철한 이성의 철학자라도 완전한 의지대로 살지는 못 한다.

    그러니까 사람은 누구도 상황적인 존재이다.

    만일 법정 스님이, 어떤 상황 때문에 세속에 남았더라면

    우리와 비슷하게 권력과 부(富), 명예에 욕심내면서 살았을 것이다.

    또 만일, 이 세상이

    인정스럽고, 진실 되며, 뇌물도, 범죄도 없는,

    사랑으로 가득한, 아름다운 세상이었다면

    그는 산으로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속세에 살면서, 정치도, 경제도, 문화도 이루고 살아야 하는

    우리 인간의 운명적 입장에서 보면

    입산하여 무소유를 부르짖는 법정 스님은 아나키스트이다.

    마음 둘 곳 없는 이 사회가 그를 산으로 쫓았다.

    그리고 산에서는 비로소 보이는 욕심 너무 부리지 말라고

    잔잔한 글이지만 준엄하게 외치고, 간절하게 소망한 것이다.

    물론, 카필라 성의 영화(榮華)를 져버리던 싯다르타 같은 고뇌가

    법정을 산에서 살게 했을 수도 있지만,

    그 어떤 경우라도 인간의 사랑과 평화를 외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가 쓴 책, 그가 글로써 호소하는 무소유의 외침을 읽으며

    그가 말하는 삶이 옳다는 건 알았고, 그가 사는 산중의 고독을 부러워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의 직업과 아파트와 의자를 버리지는 못 하지만

    자동차 운전 한 번 할 때도, 물건 하나 살 때도

    너무 각박하게 다투며 살지는 않으면 되는 것이다.

    아니, 잊어버리기 쉬운 무소유의 의미를 삶의 순간마다 느끼고

    적어도 지나친 욕심은 스스로 억제하려 노력할 줄 알면 되는 것이다.


    법정 스님은, 출타를 해서도 집의 화초에 물주는 걱정을 하는 자신을 느끼고

    너무 집착을 해서는 안 된다며 그 화분을 남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법정 스님과 같이 될 수 없다.

    화분을 누군가는 길러야 하지 않겠는가?

    누구나 산으로 들어가 무소유를 추구하면,

    누가 물건을 만들고, 문화를 창조하고, 후세를 보전하겠는가?


    무소유의 삶이란, 소유하는 삶을 전제로 한 초월이며

    소유하는 인생살이 속에서 중용을 넘지 말라는 계언(戒言)이다.

    그런데 그 책을 소유하지 못 해 마음을 졸이고 책값이 비등한다면

    법정을 존경한다면서도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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