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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ucca, Italy: Beautifully Preserved ~ Giacomo Puccini
    ◆ 추천레코드/┗⌒Classic 2017. 2. 17. 02:56


     

    Lucca, Italy: Beautifully Preserved



    루카 (Lucca)

    바다보다 26미터 더 높은 지대에 위치한 루카는 인구 9만 명의 유서 깊은 마을이다. 기원전 56년에 로마의 장군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크라수스가 모여 회담을 벌인 장소이기도 하다. 이 도시는 음악 여행을 하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빠뜨릴 수 없는 순례지이다. 이탈리아 오페라 전통의 영광을 구축한 푸치니가 이 도시의 작은 골목에서 태어나 오페라 사상 잊을 수 없는 업적을 남겼고, 오페라 ‘라 왈리’ ‘에드메아’ 등을 쓴 작곡가 알프레도 카탈라니(Alfredo Catalani, 1854~1893)와 18세기의 대표적인 작곡가 루이지 보케리니(Ruigi Boccherini, 1743~1895)가 이곳에서 태어났다.


    산 마르티노 대성당
    6세기에 건립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성당.
    이곳에는 ‘검은 얼굴의 예수’가 있다. 루카 사람들은 나무로 만든 이 예수 조각상을 ‘성스러운 얼굴’이라 부르며 모시는데, 전설에 따르면, 카톨릭과 이슬람의 100여 년간의 종교 전쟁 때, 예루살렘 사람들이 이 조각상을 배에 띄어 바다로 보냈고, 그렇게 바다를 떠돌던 조각상이 루카에 당도했다고 한다.
    이곳 산마르티노 대성당에서 오페라 ‘투란도트’의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의 가문은 4대에 걸쳐 오르간을 연주했다.


    푸치니 생가
    자코모 푸치니의 생가는 한국식으로는 4층 건물인데, 푸치니 가족은 2층 전체를 사용했다. 푸치니는 음악원을 졸업하는 22세 때까지 생가에서 살았는데, 현재는 푸치니의 오페라 포스터, 어린 시절 사용했던 책상과 의자, ‘투란도트’를 작곡할 때 사용한 그랜드 피아노, 육필 악보, 조상들의 초상화 등이 전시되어 있다.

    질리오 극장
    질리오 광장 남쪽에 있으며, 이곳에선 매년 6월 푸치니 협회 주최로 푸치니 콩쿠르가 개최된다.




    푸치니의 고향 이탈리아 루카 

      
    수녀의 아들로 바로크 시대를 예고한 화가 필리피노 등 유명


    케네디 센터에서 ‘라 보엠’을 본 적이 있다. 전세계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는 오페라 중 하나인 ‘라 보엠’은 푸치니가 만든 4번째 오페라다. 가난한 시인 로돌포와 바느질하는 처녀 미미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오페라, 라 보엠. 병약했던 미미는 두 사람이 첫 만남을 가졌던 다락방에서 마지막 눈을 감는다는 슬픈 이야기다. ‘내 이름은 미미’, ‘그대의 찬 손’, 그리고 로돌포의 마지막 울부짖음은 관객들의 가슴을 울린다.

    조깅 또는 자전거를 탈 수 있는 성벽 위의 산책로
    조깅 또는 자전거를 탈 수 있는 성벽 위의 산책로

    이탈리아 여행을 계획하며 푸치니의 고향인 루카(Lucca)를 방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루카는 피사에서는 11마일(17.7k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피렌체에서는 기차로 1시간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다. 도착해 보니 중세에 지어진 성벽과 건축물들로 가득찬 이곳은 매우 아름다운 도시였다. 호텔에서는 자전거를 무료로 대여해 준다고 했다. 자전거 대여소에서 빌리면 한 시간 3유로, 하루 종일은 15유로를 받는다. 루카는 성벽 위로 자전거 길이 있어 길을 따라 돌면 구시가 전체를 한바퀴 돌게 된다. 성벽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1504년 부터 짓기 시작해 1648년에 완공했다. 2.5마일에 이르는 성벽 산책로가 시민들에게 개방된 것은 1800년대 였다고 한다. 고즈넉한 성벽 길을 자전거로 달리다 보니 기분이 매우 상쾌해 진다.

    산 미켈레 성당에 있는 필리피노 리피의 작품 ‘팔라 마그리니’
    산 미켈레 성당에 있는 필리피노 리피의 작품 ‘팔라 마그리니’

    ‘알프레도 카탈라니’는 루카에서 푸치니 보다 4년 먼저 태어난 작곡가다. 대표작으로는 로렐라이(Loreley)와 라 왈리(La Wally)가 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아리아는 라 왈리에서의 ‘나 이제 멀리 떠나리(Ebben! Ne Andro Lontana)’라는 곡이다.

    왈리역은 소프라노의 양대 산맥인 마리아 칼라스와 레나타 테발디가 역시 최고지만 이 아리아 만큼은 흑인 소프라노 ‘윌헬메니어 위긴스 페르난데즈’가 가슴 절절하게 노래했다. 1981년 발표된 프랑스 영화 ‘디바’에서 첫 장면에 흐르는 곡이 바로 이 아리아다. 토스카니니는 첫 딸에게 ‘왈리’라는 이름을 붙힐 정도로 13살 연상의 카탈라니를 존경했다. 왈리는 후에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중 한 사람인 호로비츠와 결혼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카탈라니는 39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성벽 길 한복판에 세워진 이 청동상은 그의 탄생 100주기를 기념해 시에서 세운 것이다.

    루카에는 직접 올라 갈 수 있는 높은 탑이 두 개 있다. 그 중 ‘귀니지 탑’에 올랐다(입장료 4유로). 귀니지는 영주까지 배출한 루카의 명문 집안이다. 귀니지 탑을 비롯한 타워와 첨탑은 중세시대 이탈리아에 250개 이상이나 있었다고 한다. 탑 위가 정원으로 꾸며져 있는 이곳에서는 360도 각도로 시가지 전체를 조망 할 수 있다. 아! 탑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고도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멀리 보이는 건물이 루카의 두오모인 ‘산 마르티노 성당’이다.

    원형극장 광장은 말 그대로 원형극장이 있던 장소였다. 현재는 광장 겸 시장으로 바뀌어 시민들의 만남의 장소로 이용된다. 광장 앞에는 ‘산 프레디아노 성당’이 위치해 있다. 성당 전면부의 모자이크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양 옆으로는 천사가 날개를 펼치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12명의 제자들이 등장하고 있는 모습이다. 본당 중앙 전면에는 유리관으로 만든 ‘성녀 지타’의 시신이 안치돼 있다. 성녀 지타는 13세기 루카에서 활약한 하녀와 가사도우미의 수호성인이다. 그녀는 파티넬리 가문의 하녀로 주인의 신임과 허락을 받은 후, 가난한 이웃들을 도왔다고 한다. 성인들의 순교를 조각해 놓은 대리석 침례탕은 12세기 부터 사용해 온 중요한 조각품 침례탕이다. 루카에서는 두오모 보다 더 화려한 곳이 ‘산 미켈레 성당’이다. 8세기에 최초 건설된 이 성당은 웅장한 대리석 파사드가 독특한 매력을 발산한다. 내부에는 12세기에 제작된 예수님이 못 박혀 있는 십자가가 중앙제단에 설치돼 있다. 작은 예배당에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마리아의 동상 등 아름다운 성화들이 그려져 있다. 그 중에는 필리피노 리피(Filippino Lippi)의 작품인 팔라 마그리니(Pala Magrini, 1483)도 보인다.

    필리피노는 그의 아버지 ‘프라 필리포 리피’와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에게 그림을 배운 화가로 그의 작품은 워싱턴, 로마, 피렌체, 부다페스트 등 세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아버지 프라(수도사) 필리포 리피(Fra’ Filippo Lippi)는 당시 유명한 화가겸 수도사였다. 1456년, 필리포(50세)는 프라토에 있는 산타 마게리타 수녀원 교회에서 젊고 아리따운 루크레치아 부티(22세) 수녀를 보고 단번에 마음을 빼았겼다. 필리포는 성모(聖母)를 그리려면 모델이 필요하다며 교회에 간청,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시간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그녀를 집으로 납치, 두 사람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 났다. 그가 바로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로 바로크 시대를 예고한 필리피노 리피다. 당시 이 사건은 프라 필리포의 투옥과 고문 등으로 큰 후유증을 남겼지만 코시모 데 메디치의 주선으로 교황의 특면장이 내려 졌다. 이렇게 해서 리피 가문에서는 두 명의 위대한 화가를 배출하게 된 것이다. 부티 수녀를 그린 필리포 리피의 ‘성모자상’은 워싱턴 국립미술관에 가면 감상할 수 있다.

    글, 사진: 곽노은



     O mio babbino caro (Instrumental) -

    Gianni Schicchi - Giacomo Puccini      


    O mio babbino caro (Instrumental) from the opera Gianni Schicchi by Giacomo Puccini. From the album "Puccini Without Words." Performed by Andre Kostelanetz and his orchestra & Columbia Symphony Orchestra.


    Ah, Mimi, tu piu non torni (Instrumental) from Act IV of the opera La Bohème by Giacomo Puccini.

    From the album "Puccini Without Words."

    Performed by Andre Kostelanetz and his orchestra & Columbia Symphony Orchestra.

     


     Final Scene/Death of Mimi (Instrumental) from Act IV of La Bohème by Giacomo Puccini. From the album "Puccini Without Words." Performed by Andre Kostelanetz and his orchestra & Columbia Symphony Orchestra.


    자코모 푸치니

    Giacomo Puccini



    이탈리아 남자가 바람둥이라는 말은 어떻게 생겼을까? 그 말의 중심에 두 사람이 있다. 자코모 카사노바(Giacomo Casanova)와 오페라계의 카사노바라 불리는 자코모 푸치니(Giacomo Puccini, 1858~1924)다.베르디 이후 최고의 작곡가로 불리는 푸치니는 음악가 가문에서 자랐다. 하지만 다섯 살이 되던 무렵 세상을 떠난 아버지로 인해 가난한 삶을 살게 된다. 정부지원금으로 생계를 꾸려야 할 만큼 어려운 삶은 평생 그를 따라다닌다.음악가를 꿈꿨던 푸치니는 자유로운 영혼을 지니고 있었다. 음악원에 등록했지만, 가난 탓에 공부가 쉽지 않았다. 그 가난한 시절의 기억은 이후 오페라 〈라 보엠(La Bohème)〉의 소재가 된다.


    앙리 뮈르제르(Henri Murger)가 파리 뒷골목의 일상을 그린 소설 《보헤미안 생활 정경(Scènes de la vie de bohème)》은 가난한 젊은이들이 몰려 살며 온갖 기쁨과 애환을 나누고 성장해가는 이야기였다. 푸치니는 이 소설을 통해 가난했던 시절을 회상하고, 〈라 보엠〉을 작곡하게 된 것이다.낡은 아파트 최고층엔 시인 로돌포가 살고 있었다. 그 방엔 수많은 음악가와 친구들이 몰려드는 아지트였다.


    크리스마스이브, 이웃집 미미가 촛불을 빌려 돌아가려다가 자기 방 열쇠를 잃어버리고 촛불까지 꺼져 당혹한다. 그때 로돌포가 미미를 위로하며 차가운 손을 잡고 ‘그대의 찬 손’을 부른다. 두 사람의 노래를 듣고, 아래층에 모여 있던 친구들이 모여든다. 그들이 함께 거리로 내려가 ‘오 사랑스런 그대’를 함께 부른다.

    〈라 보엠〉은 푸치니가 ‘선율의 대가’임을 증명해준다. 확고한 구성력과 서정적이면서도 허점 없는 선율 속에 가난한 청년들이 사랑의 고뇌와 환희 등을 마음껏 표출한다.

    푸치니는 로맨스를 즐길 수 있는 조건과 행동력을 갖추고 있었다. 외모가 수려하고 호탕해 많은 여인이 따랐다. 푸치니 자신도 그런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을 ‘나는 들의 오리와 오페라 대본, 멋진 여성을 쫓아가는 사냥꾼’이라고 표현했다.


    로맨티시스트인 푸치니는 〈라 보엠〉 외에도 〈나비부인〉, 〈토스카〉 등 보석 같은 12작품을 남겼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선이냐 악이냐의 단순함이 아닌 자기 운명을 주체적으로 결정하는 입체적 인물로 등장한다.



    문제 학생, 푸치니 

     

    푸치니의 인생을 바꾼 것은 열여덟 살에 관람한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Aida)〉였다. 그 공연을 통해 오페라 작가를 꿈꾼 이후 피사에서 열리는 공연을 보기 위해 집에서 35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을 걸어 다녔고, 피아노 연주를 통해 자금을 열심히 모았다.1880년, 드디어 그의 꿈이 이루어진다. 밀라노 국립음악원에서 푸치니의 재능을 인정해 입학을 허락한 것이다. 모은 돈이 턱없었지만, 밀라노행을 막을 순 없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이탈리아 정부 주도로 움베르토 1세 즉위 2년차를 기리기 위해 스무 살 이하 청소년을 대상으로 장학금을 지급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당시 푸치니는 스물한 살이었지만, 어머니가 아들의 호적을 고치는 편법을 동원하여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밀라노 국립음악원은 푸치니의 재능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최고의 교수진을 통해 푸치니는 많은 것을 배우고 있었다. 하지만 푸치니는 음악학원 최고의 문제 학생이었다. 꽃다운 여성을 보면 바로 필이 꽂혀 벌처럼 쫓아다녔다. 잘생긴 외모 덕에 여자들도 줄을 이었다. 덕분에 여복이 많았지만 여난도 끊이지 않았다.

    이후에도 여색을 탐하면서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던 푸치니였지만, 어느 순간 푸치니를 사로잡은 치명적인 여인으로 인해 그의 삶엔 그림자가 드리운다.


    한 여인의 저돌적인 구애

    3년간 밀라노 생활을 마치고 귀향했을 때 그의 인생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두 여인을 만나게 된다.

    첫 번째가 리코르디 출판사 사장 줄리오 리코르디(Giulio Ricordi)이고 두 번째가 애증관계를 반복한 숙명의 여인 엘비라 제미냐니[본투리, Elvira Geminagni(Bonturi)]이다. 당시 음악계는 ‘리코르디 왕국’이라 불릴 만큼 리코르디 출판사의 위력이 막강했다. 리코르디 사장은 푸치니의 첫 오페라 〈빌리(Le Villi)〉 상연을 주선해 주면서 인연을 맺는다. 하이네의 낭만적 이야기를 소재로 한 〈빌리〉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린다. 이 공연 이후 리코르디와 푸치니는 전속계약을 맺게 되고, 푸치니의 입지는 당당히 자리를 잡는다.



    푸치니와 엘비라 제미냐니
    푸치니와 엘비라 제미냐니


    엘비라는 푸치니의 기대치엔 미치지 못하는 여인이었다. 어떻게 푸치니가 그녀에게 평생을 끌려다녀야 했는지는 두고두고 미스터리다. 엘비라는 푸치니의 어린 시절 친구인 나르시소 제미냐니의 부인이었고, 이미 두 명의 딸을 둔 유부녀였다.식품도매업을 하고 있던 제미냐니는 음악적인 재능은 부족했지만, 피아노를 잘 치고 싶었던 아내를 위해 푸치니를 소개해 주었다. 하지만 그게 문제였다. 피아노 교습을 받는 과정에서 둘 사이에 야릇한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푸치니에게선 돈만 많은 남편에게 없는 풍류와 멋이 있었다. 여성편력이 심했던 푸치니 역시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엘비라가 싫진 않았다. 더 적극적이었던 것은 엘비라였다. 집요한 유혹에 푸치니도 금방 빠져들었지만, 둘 사이는 오래가질 않았다.



    의심이 많고 충동적인 엘비라에게 금방 싫증을 느낀 것이다. 하지만 이미 둘은 정리할 수 없는 단계에 와 있었다. 임신한 남산만 한 배를 거머쥐고 엘비라가 푸치니의 집에 들이닥친 것이다. 그 일로 푸치니의 인생은 엘비라에게 완전히 묶여 버린다.두 사람은 보수적인 고향 사람들에게 ‘가문에 먹칠한 것들’, ‘가정을 깬 파렴치범들’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았고, 푸치니의 누나들은 차마 거리에 나갈 수 없을 지경이었다.


    푸치니만이 그런 비난이 아무렇지 않았다. 하지만 제미냐니의 보복이 두려워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1886년 가을, 푸치니는 엘비라와 함께 이탈리아의 시골 마을에 숨어 지낸다. 빌라를 짓고 살았던 지중해 호수도시인 토레 델 라고는 이들 불륜 부부 덕에 관광명소가 되었다.

    둘 사이에 안토니오(Antonio)가 태어난다. 유일한 혈육인 안토니오의 탄생은 푸치니의 인생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아들을 낳자 독점욕이 강해진 엘비라가 의부증까지 생겨 푸치니를 철저하게 조종하려 한 것이다.


    푸치니의 대성공과 코리나

    유부녀와 바람피우고 사생아까지 낳는 바람에 푸치니는 불안한 도망의 나날을 보낸다. 그러면서도 1889년 리코르디의 도움으로 신작 오페라 〈에드가(Edgar)〉를 발표한다. 도망 다니는 자신의 심정을 대변한 아리아 ‘아듀, 아듀, 내 사랑(Addio, addio, mio dolce amor!)’ 속에는 탄식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그의 오페라는 실패한다. 하지만 리코르디는 푸치니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새로운 곡을 의뢰한다. 그래서 나온 곡이 〈마농 레스코(Manon Lescaut)〉이다.

    사치와 향락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 여주인공 마농과 그녀의 비도덕적 행위를 싫어하면서도 그녀의 매력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귀족 청년의 이야기가 담긴 〈마농 레스코〉는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이 작품이 성공한 1893년부터 푸치니라는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고, 그는 세계적인 작곡가 반열에 오르게 된다.

    1896년, 〈라 보엠〉이 초연되고 인세수입이 폭증하면서 푸치니의 삶도 달라진다. 푸치니와 엘비라의 사치스러운 생활이 시작된다. 푸치니의 바람기도 다시 시작된다.



    〈라 보엠〉 초연 포스터(1896)
    〈라 보엠〉 초연 포스터(1896)


    〈라 보엠〉은 전 4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무대는 1830년대로 파리의 뒷골목 다락방에서 살고 있는 시인 로돌포, 화가 마르첼로, 철학자 코르리네, 음악가 쇼나르 등 보헤미안 기질을 가진 네 사람의 방랑생활과 우정, 그리고 폐결핵을 앓는 소녀 미미와 로돌포의 비련을 묘사하고 있다. 이 오페라는 처음 얼마동안 흥행하지 못했다. 그러나 재차 수정된 후 푸치니 음악적 특징이 소재와 아름답게 조화될 수 있었고 이탈리아 오페라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남게 되었다.

    1900년에는 젊은 여성 코리나에게 푹 빠졌다. 평생 새로운 여인을 탐하고, 그 과정에서 창작 열정이 샘솟는 푸치니에게 코리나는 새로운 창작의 활력소였다. 푸치니가 코리나에게 사랑을 넘어 집착 증세를 보이자 엘비라의 질투심은 극에 달한다. 두 사람을 떼 놓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한 것이다.

    처음엔 투정을 부렸고 그것이 통하지 않자 단식 투쟁을 했다. 그래도 몰래 만나자 미행도 서슴지 않았다. 어느 날 푸치니가 오리 사냥 간다며 집을 나서는데 사냥 복장도 아니었고 비까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이를 수상하게 여긴 엘비라가 전부터 의심스럽게 여긴 장소를 불시에 찾아갔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밀애를 끝낸 푸치니??방금 떠난 뒤였고, 코리나의 마차도 출발하려던 찰나였다.

    눈이 뒤집힌 엘비나가 마차 안으로 미친 듯이 돌진해 들어갔다. 당황한 코리나는 엘비라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이 장면에 놀란 마부가 마차를 몰자 엘비라는 개울가로 꼬꾸라지면서 상처를 입었다. 분이 안 풀린 엘비나는 집에 달려가 푸치니가 돌아오기만 기다렸다.

    사냥을 다녀온 것처럼 야생오리 몇 마리를 정원에 내려놓던 푸치니의 얼굴을 엘비나는 손톱으로 사정없이 긁어 버렸다.


    강요에 의한 결혼

    어느 날 푸치니 가족에게 큰 교통사고가 난다. 짙은 안개가 낀 늦은 밤, 무도회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에 일가족이 탄 차가 계곡으로 굴러떨어진 것이다. 다행히 엘비라와 안토니오는 찰과상에 그쳤으나 푸치니는 우측 다리가 부러졌다. 그 사고 이후 푸치니는 평생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 했다.

    이 사고가 난 다음 날, 병원에 누워있던 푸치니에게 엘비라의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가톨릭 국가인 이탈리아에선 이혼할 수 없었다. 엘비나의 남편이 살아 있는 한 두 사람은 결혼은 할 수 없었다. 푸치니 역시 함께 살긴 했지만 결혼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엘비라의 법적 남편이 죽음으로 둘 사이의 결혼이 가능해졌다. 그때부터 엘비나는 푸치니에게 결혼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결혼 생각이 없던 푸치니는 머뭇거렸다. 그러자 엘비나는 푸치니의 누나들을 찾아가 설득했다. 남의 아내와 바람을 피워 도망 다니던 동생이 결혼할 수 있다는 생각에 누나들은 한달음에 병원으로 달려왔다. 누나들의 독촉으로 결국 두 사람은 정식으로 결혼을 한다.

    이는 아들이 태어난 지 8년째 되던 해였다. 엘비라가 결혼에 집착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푸치니가 법적인 아내를 두면 바람을 덜 피우리라 기대기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큰 오해였다.

    푸치니는 마초 같은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예술가 대부분이 까칠하거나 꾀죄죄했던 것과는 달리 멋을 알고 꾸밀 줄 아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나이가 들수록 더 멋있어지는 근사한 외모에 명성, 재력, 실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푸치니 본인조차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많은 여자가 자청에서 접근해왔다.


    엘비라의 질투에 희생된 하녀

    푸치니는 수많은 여인과 염문을 뿌리면서도 늘 새로운 여인을 탐했다. 그리고 새로운 여인을 만날 때마다 ‘내 작은 정원’이라 불렀다. 푸치니의 여성편력이 심해질수록 엘비라는 질투의 화신으로 변해갔다. 엘비라의 질투는 급기야 순박한 여인을 자살하게 한다. 그것이 유명한 ‘도리아 만프레디 사건’이다. 푸치니의 화려한 연애 경력에 정점을 찍은 이 사건은 유럽 전체를 뒤흔들었다.

    푸치니에겐 세 가지 취미가 있었다. 오리 사냥과 담배, 운전이 그것으로 하루 80개비 이상의 담배를 피우고, 최고급 승용차를 15대나 보유하고 있을 만큼 여성 다음으로 차를 사랑했다. 자신의 차로 제한속도 근처까지 차를 몰고 다닐 만큼 스피드광이었던 그는 교통사고를 당한다. 대퇴부골절로 8개월을 병상에 누워 있어야 하는 중상이었다. 이때 푸치니는 자신을 돌볼 간병인을 채용하게 되는데, 그녀가 열여섯 살 소녀 도리아 만프레디(Doria Manfredi)다.

    〈나비부인〉을 작곡 중이던 푸치니는 도리아의 간호에 큰 도움을 받는다. 지극정성으로 간호한 도리아 덕에 3년에 걸친 작곡은 마무리되고, 드디어 〈나비부인〉이 세상에 나온다.

    푸치니는 불편한 자신을 정성으로 돌보아준 도리아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상냥하게 대했다. 철저히 순수한 마음에서 이뤄진 일이었으나, 의부증이 심했던 엘비라의 눈에는 좋게 보이지 않았다. 그때부터 죄 없는 도리아를 중상 모략하기 시작한다.

    “나이도 어린 것이 아버지뻘한데 꼬리 쳤다”면서 “호수에 빠져 죽으라”는 악담을 퍼붓는 일을 마다치 않았다. 질투에 눈이 먼 엘비라는 두 사람이 부인해도 불륜관계라고 소문내고, 도리아를 구박하며 내쫓았다.

    어린 도리아는 헛소문에 억울하고 창피했다. 아무리 결백하다고 주장을 해도 자기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독약을 마시고 생명을 끊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그 일로 화가 난 도리아의 부모는 자신의 딸이 결백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부검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녀가 처녀임을 입증해낸다.

    그녀의 억울함은 2007년 발견된 편지와 사진에 의해 풀어진다. 푸치니가 사귄 것은 자주 들렀던 카페의 여종업원 줄리아 만프레디(Giulia Manfredi)였다. 그녀는 도리아의 사촌이었다. 자신의 불륜 사실이 드러날까 두려워 도리아에게 누명을 씌운 것이다. 엘비라는 도리아의 죽음에 책임을 물어 5개월 5일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언론은 이 사건을 두고 ‘이것이 바로 오페라다’라는 기사를 내보낸다.

    푸치니는 이 사건을 계기로 엘비라를 떠날 결심을 하게 된다. 이때 아들 안토니오가 어머니를 감옥에 버려두면 자신도 군대에 가버리겠다고 하소연하는 바람에 결심은 꺾게 된다. 그리고 도리아의 부모에게 거액의 배상금을 주고 고소를 취하하도록 한다.

    당시 푸치니는 오십 살, 엘비라는 마흔여덟 살로 두 사람이 함께 산 지 24년. 그동안 온갖 일을 다 겪고 그 고뇌가 푸치니의 유작 오페라 〈투란도트(Turandot)〉에 그대로 반영된다.

    매정한 얼음공주 투란도트는 엘비라를, 칼라파 왕자를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노예 소녀 ‘류’는 가련한 도리아를 비유했다.[클래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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