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ted Nude, Ca. 1917
by Amadeo Modigliani
Nu Sur Coussin Bleu
by Amadeo Modigliani
Reclining Nude with Arms Open
by Amadeo Modigliani
Reclining Nude with Arms Above the Head
by Amadeo Modigliani
Seated Nude 1913
by Amadeo Modigliani
Cariatide
by Amadeo Modigliani
에콜 드 파리의 전설과 모딜리아니
1884년 모딜리아니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피렌체 남쪽의 작은 항구 도시 리보르노에서 아버지 플라미니오 모딜리아니, 어머니 에우제니아 가르신의 네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부유한 유태인이었고, 모딜리아니는 자신이 유태인이란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후일 잔느 에뷔테른느와의 결혼에는 이 문제가 극심한 반대의 사유가 되었지만), 초등학교 시절의 모딜리아니는 그림에 뛰어난 소질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천재성을 질투라도 하듯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해 폐결핵을 앓을 만큼 잔병치레를 많이 했다. 10살에 늑막염을 앓고, 14살 때에는 장티푸스와 폐렴 때문에 중학교 과정을 중퇴하기까지 했던 모딜리아니는 그후 미켈리 밑에서 미술을 공부하던 중, 17살 되던 해에 다시 폐결핵이 생겨 요양한 후 어머니와 함께 로마와 카프리, 나폴리, 피렌체 등지의 미술관을 여행하며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에 대한 교양을 쌓았다. 그는 문학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 단테Dante, 페트라르카Petrarch, 레오파르디Leopardi, 카르두치Carduchi, 다눈치오Dannunzio 등 이탈리아 위대한 고전 시인과 니체, 쉘리, 보들레르, 말라르메, 랭보, 로트레아몽 등의 시를 줄줄 암송하곤 했다고 한다. 그에게 이탈리아는 자신의 작품의 원천이자 영감이었던 셈이다.
1906년 22세의 나이로 처음 파리에 도착한 모딜리아니에게 프랑스 파리는 전혀 새로운 곳이었다. 그만큼 당대의 파리는 세계 예술계의 일번지로서 모든 유행의 첨단을 달리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1907년 세잔느의 회고전을 보고 커다란 감동을 받는다. 일찌기 화가. 세잔이 세상의 모든 것 “자연은 구형·원통형·원추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라는 견해로 자연을 단순화된 기본적인 형체로 집약하여 화면에 새로 구축해 나가는 자세를 주장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모딜리아니의 모든 회화에 나타나는 단순하고 우아한 선의 아름다움은 사실상 이때 결정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08년 처음으로 <유태여인> 등 유화 여섯 점과 데생 한 점을 앙데팡당전(展)에 출품하였다. 다음해에는 조각가. 브랑쿠시와 조각 제작을 시도하여, 원시 흑인 조각과 브랑쿠시풍의 간결한 조형 양식을 흡수 발전시킨 독자적 조각 작품을 만들었지만 그의 허약한 체력과 병약한 폐는 조각에 전념할 수 없도록 했다.
그는 1913년 몽파르나스로 옮겨 에콜 드 파리의 화가들과 키슬링, 수틴 등과 사귀었다. 그 자신이 '에콜 드 파리(파리파)'의 뛰어난 작가로서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많은 걸작을 남겨 대표적인 화가로 손꼽히게 된다. 그러나 그에게 프랑스는 다른 화가들에게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낙원만은 아니었다. 파리에는 그처럼 그곳만의 예술적 숨결을 느끼기 위해 몰려든 각국의 예술가들이 있었다. 이들을 일컫는 말이 '에콜 드 파리'다. 그곳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모딜리아니는 이방인이었고, 보헤미안이었다. 예술적 성취에 대한 초조함, 경제적 불안정, 그리고 선천적으로 허약했던 몸은 그를 술집에서 술집으로 전전하며 자신의 삶과 건강을 소진하게 했다. 그는 항상 가난했지만 자신의 자존심만은 팔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림 그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모딜리아니의 초상화 - 고독으로 꽃피운 사람들
@ 에콜 드 파리 (Ecole de Paris)-----------------------------------------------------------------
에콜 드 파리는 "파리파"라는 뜻으로 제1차 세계 대전부터 제2차 세계 대전까지 파리의 몽파르나스를 중심으로 활약한 주로, 외국인 화가들의 총칭이다. 제1차 대전 전후, 파리에는 많은 외국인 화가들이 모여들었는데, 그 중 이탈리아의 모딜리아니, 러시아의 샤갈, 네덜란드의 반 동겐, 독일의 에른스트, 스페인의 피카소, 미로 등이 대표적인 작가이다.
파리파는 특별히 공통되는 주의나 양식이 없이 제각기 독자적인 양식을 추구하며 활동했기 때문에, 20세기의 어떤 이즘이나 유파와는 성격이 다르다.
모딜리아니, 샤갈, 수틴, 파스킨, 키슬링, 등이 모두 유태계 화가였기 때문에 애수를 띤 우울한 정서를 보여주었으며, 그 중 샤갈은 러시아의 민담이라든가, 유태인의 속담과 신비적인 전설 등을 주로 그렸다. 감상적이며 퇴폐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한 것이 그들의 공통점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파리파는 해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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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딜리아니의 작품은 주로 인물화 그것도 초상화에 집중되어 있다. 그림의 소재로 인간이 등장한 것은 회화의 역사와 같다고 해도 좋을 만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화가가 대상인 사람을 특별히 신격화하거나 신성으로 치장하지 않아도 된 시점은 그리 오래지 않다.(그것은 서양에서는 근대 자본주의의 성장과 궤를 같이 한다.) 물론 모딜리아니는 많은 누드화를 남기고 있지만 그에게 있어선 누드화 역시 초상화의 범주에 넣지 않으면 안된다.
그의 작품 속에 그려진 인물들은 한눈에 봐도 특이한 형태로 그려져 있다. 많은 평자들이 그의 초상화에 대한 양식을 논하고 있으므로, 이 자리에 긴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앞서 말한 대로 그의 회화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우하고 부드러운 선과 아프리카 원시 미술의 때묻지 않은 단순한 형태와 색채, 세잔의 영향, 자신이 직접 겪으며 마주 대해 온 모델과의 관계 속에 꽃 피운 작품 양식이다.
말로는 이렇게 단순화시켜 그의 그림이 무슨 영향을 받아 어떻게 형성되어 왔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의 화풍을 이렇게 단순화하는 것은 치명적인 위험이 따른다. 왜냐하면 모딜리아니의 초상화는 모딜리아니 이외의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보적인 것이자, 모델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내면 세계를 화폭 위로 옮긴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만의 양식이 담긴 인물 속에 모델들의 심리적인 상태를 표현함으로써 오늘날 위대한 화가로 평가받는 것이다.
어쩐지 그의 초상화들은(누드화를 포함해서) 한결같이 난초 혹은 베고니아 화분을 닮은 걸까?(이건 순전히 저의 생각입니다만) 그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의 초상화에는 눈동자가 빠져 있거나 아니면 한쪽 만 그려져 있거나, 그도 아니면 무언가를 꿈꾸는 듯한 표정을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문득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을 느끼게 된다.(누구는 이걸 술병이라고 표현하지만)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한결같이 생활이 거세된 채 표현된다.(아니 생활이 거세되었다기 보다 모딜리아니 자신이 생활이란 걸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지 않았거나 아니면 일부러 누락시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렇다고 해서 생의 무게까지 제거된 것은 아니라는데 그 통증의 원인이 있지 않을 성 싶은데…. 그의 그림 속에 생의 공허와 외로움이 묻어나는 까닭 같은 것 말이다.
그의 초상화에 등장하는 모델들은 대부분 화가와 친분이 있는 인물들이었다. 모딜리아니 자신이 모델을 살만큼 돈이 없었던 탓도 있겠지만, 그만큼 그는 모델과의 심리적인 교감을 중시했다. 예전에 장선우 감독의 영화 중에 <나쁜 영화>란 영화가 있었는데 이 글을 읽는 분 중에서도 말많았던 그 영화를 기억하는 분들이 계시리라. 이 영화를 보고나서 한참이나 욕지기가 나서 애먹은 적이 있다. 나는 그 영화를 보고 나서 장선우 감독을 떠받드는 이라면 평론가들까지 싸잡아 믿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논란의 여지는 있겠으나 미학적인 완성도 자체가 형편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판단을 내리게 된 나름의 원인을 찾자면 다음과 같다. 사진과 영화의 공통점은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도구로서의 렌즈는 물리적이고, 광학적인 특성을 갖는다. 하지만 그 도구를 통해 세상을 들여다보는 것도 사람이요, 그 대상도 역시 사람이다. 따라서 렌즈를 통해 본 세상 역시 한 인간의 모습을 닮고 담아내게 된다. 그런데 장선우 감독의 영화를 보고난 뒤의 내 느낌은 그의 영화(실제 다큐멘터리와 유사한 제작 과정을 거쳐 제작되었다는) 어디에도 렌즈를 통해 바라본 대상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내가 그의 영화를 보면서 욕지기를 느낀 것은 어떤 개구장이 악동의 탐욕스럽고 호기심어린 시선이 배우들과 길가의 행려, 노숙자들을 줄곧 몰아세우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딜리아니는 대상이 비록 가난하고, 보잘 것 없더라도 모델의 삶과 인생을 가까이 지켜봐 온 사람으로서 자신의 작품을 통해 모델과 대화를 나눈다. 차가운 시선이 아니라 더할 나위 없이 따뜻한 마음으로….
천국에서도 당신의 사랑이 되어드릴께요.
모딜리아니는 선천적으로 병약했으나 예술적 성공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불태웠다. 그럼에도 생전에는 폴 기욤, 즈보로브스키 등 일부 화상(畵商)이 원조했을 뿐, 세상의 인정을 받지는 못했다. 그는 가난 속에 과음과 방랑을 일삼다가 1920년 초 불과 36세의 나이로 파리의 자선병원에서 짧은 일생을 마쳤다.
그런 그의 인생에 빼 놓을 수 없는 두 명의 인물이 있었으니, 그 중 한 명은 폴란드 출신의 시인이자 화가였던 레오폴드 즈보로프스키와 모딜리아니의 영원한 사랑 잔느 에뷔테른느였다.(잔느 에뷔테른느는 엄격한 카톨릭 가정에서 태어나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유태인인 모딜리아니와 결혼한다. 3년간의 결혼생활을 통해 한 명의 딸을 두었다. 둘째 아이를 가진지 9개월만에 남편 모딜리아니가 죽자 그와 함께 영원히 함께 하는 반려자가 된다.)
즈보로프스키와 모딜리아니의 관계는 마치 빈센트 반 고흐와 동생 테오와 같았으며 그 관계는 친구 이상으로 진한 것이었다. 즈보로프스키는 모딜리아니를 자신의 아파트에서 작업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그의 예술에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 주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모딜리아니의 영원한 사랑 잔느 에뷔테른느이다. 19세의 미술학도였던 잔느는 33세의 모딜리아니를 만나 그의 반려자가 되었다. 잔느는 생활의 반려자일뿐만 아니라 그의 예술의 숨결 같은 존재였다. 이듬해 잔느는 딸을 낳는다. 모디는 딸의 이름을 사랑하는 아내의 이름을 따서 잔느라고 지었다.(이 딸 잔느가 후일 성장하여 미술사가가 되어 모딜리아니 연구의 기초가 될 수 있는 자료들을 모아 만든 평전 『모딜리아니:인간과 신화』의 저자이다.) 이 시기가 모딜리아니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한 때였다.
1919년 무렵 모딜리아니는 파리에서 화가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잔느는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좋아진 상황과 한 아이의 아버지라는 처지에도 불구하고, 모디는 작품에 대한 열정과 끝없는 음주벽을 놓지 못했다. 모딜리아니의 그림 <잔느 에뷔테른느>(1919년작)는 이때에 그려진 것이다. 임신한 잔느의 모습은 왠지 처연하다. 그 눈동자 없는 눈은 그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담아 슬프게 바라보고 있는 듯 하다.
"천국에서도 당신의 아내가 되어 줄 께요…"(이때 이 두 사람 사이의 이야기를 말하는 많은 전설같은 이야기들이 남아 있는데 일설에는 모딜리아니가 자신의 아내인 잔느에게 "천국에서도 나의 모델이 되어달라"고 했다는 말도 있고, 잔느가 "천국에서도 당신의 아내가 되어 주겠다"고 말했다는 설도 있지만 확인되지 않은 것들이다. 다만 가톨릭 교육을 받고 자란 임신 9개월의 여자가 남편을 따라 투신자살한 사건은 인간도 동물인 이상 뱃속의 아기를 지켜야 한다는 모성 본능을 초월한 일대 사건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들 부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전설이 될 수밖에 없었으리라. 다음은 그의 죽음의 과정을 소설투로 옮겨 본 것이다.)
1920년 1월 겨울 어느날, 모디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으로 추정되는 자화상을 완성시켰다.(20세기 최고의 초상화가로 꼽히는 그이지만 특이하게도 자신의 자화상은 거의 남기지 않았다.)그는 얼음장 같이 찬방에서 피를 토한 채 쓰러져 있었다. 그 옆에는 만삭의 잔느가 웅크리고 앉아 죽어가는 모딜리아니를 조용히 바라본다. 하지만 그녀 자신이 모딜리아니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잔느 자신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침대 주변에는 몇 개의 빈 포도주 병과 반쯤 얼어버린 정어리 통조림이 뒹굴고 있었다.
친구들이 달려와 이 모습을 발견하고는 곧 병원으로 옮겼으나 모딜리아니는 세상을 떠나 버린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천국에서도 당신의 아내가 되어 줄께요" 라고 전설처럼 말했다는 잔느 에뷔테른느 역시 임신 9개월의 몸으로 자신의 양친의 집 6층 창에서 투신 자살한다. 그의 아기는 단 한번도 입 밖으로 울음소리를 토해내지 못한 채 부모의 뒤를 따랐다.
모딜리아니의 형 임마누엘은 그를 "왕자처럼 묻어달라"고 전보를 보내왔다.
Self-Portrait
Oil on canvas, 33½ x 23½, (브라질의 Mrs. Yolanda Matarazzo 수집)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모딜리아니는 좀처럼 자화상을 그리지 않았다. 그가 죽기 얼마전,가 무엇을 느꼈던 것일까? 그는 1919년 처음으로 자신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화폭 위의 화가는 가장 잘생긴 미남화가라는 칭호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왜소하다. 빠레트위의 색깔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가라앉은 색깔이다. 선척적으로 약했던 그는 죽음의 공포에 짓눌려 살았던 것일까? 어쩌면 그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생각도 못한채 굴종하며 겨우 술과 마약으로 미약한 반항이나마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사랑하는 여자를 만났으면서도 운명을 바꾸지 못한 채 죽음을 향해가던 비운의 모습이 그의 그림 속에 베어있다.
Portrait of Lunia Czechowska, 1919
모딜리아니의 초상화는 사실적이라기보다는 몽상적이고 환상적이다. 그는 목과 코를 유난히 길고 굴곡지게 그리면서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반사해냈다. 사실적이지 않음에도 모델의 분위기가 살아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눈동자도 없는 얼굴이 어떻게 살아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그 살아움직임은 화가의 생명력인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보는 관객의 생명이 그 안에서 숨쉬기 때문인지 모른다. 눈동자는 마음의 창이라고 하는데 텅빈 눈동자를 보며 관객은 그 안에 자신의 눈동자를 박아 모딜리아니의 그림에 생명력을 넣어주는지도 모른다. 언뜻보면 만화같은 그림인데도 얼굴 하나를 자세히 살펴보면 놀라고 만다.같은 피부색깔을 여러톤으로 주면서 입체화시켰다. 그녀의 꼭 다문 작은 입술은 폐쇠적이면서 내성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불쑥 튀어나온 볼로 생겨난 그림자는 자신의 성격으로 인해 마음에 담게된 불만과 불평을 보여주고 있는 것같다. 뒷배경으로 색칠해진 검은빛 톤도 그녀의 어둡고 외로운 모습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것 같다.
Reclining Nude, 1917
모딜리아니는 여자의 모습을 작품으로 많이 남겼다. 이중 누드화는 초상화와는 매우 다른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길게 그리고 선을 굴곡시키는 등 추상적인 요소를 많이 갖고 있는 초상화와는 달리 누드화는 현실주의에 가깝다. 또한 작품 분위기가 매우 강렬하다. 일상생화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나고자 술과 마약에 도취되었던 모딜리아니가 자신의 작품에서 반영시키려는 권태로움과 슬픔은 유독 누드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누드화는 유독 친근하고 강렬유한 느낌을 선사한다. 초상화중 자신의 아내였던 잔느의 그림에서만이 볼 수 있었던 그 친근함과 강렬함이 누드화에는 생생하게 살아나있다.
티없이 아름다운 나체로 부끄러움없이 소파에 적나라하게 누워있는 이 여자는 육체만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감정까지도 모두 드러내고 있는 느낌이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나른하게 누워있지만 그녀의 얼굴엔 우수가 남겨져 있다.
Jeanne Hebuterne
모딜리아니는 세잔느나 달리처럼 자신의 아내를 즐겨 그렸다. 이 작품에서도 다른 초상화에서처럼 기다린 코와 목이 특징적이다. 눈동자가 없음에도 관객은 그 눈동자를 읽을 수 있다. 검은 머리를 한 잔느가 검은 옷에 검은 모자를 쓰고 슬픈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핏빛으로 물든 것처럼 뒷배경이 슬픔을 노래한다. 모딜리아니가 그린 잔느의 그림은 몇작품을 빼놓고는 모두가 처량하다. 어쩌면 모딜리아니는 잔느의 슬픈 운명을 보았을지 모른다. 자신을 만났기 때문에 슬픈 운명을 가져야했던 잔느. 모딜리아니가 정말 그녀를 사랑했다면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지 말았어야하지 않았을까. 나는 잔느의 초상화를 볼 때마다 그녀의 아픔이 내 것처럼 슬프게 느껴진다.
Nudo Seduto
by Amadeo Modigliani
Nudo Disteso
by Amadeo Modigliani
Cariatide
by Amadeo Modigliani
Cariatide
by Amadeo Modigliani
Nudo Femminile di Fronte
by Amadeo Modigliani
Cariatide
by Amadeo Modigliani
Seated Nude, ca. 1918
by Amadeo Modigliani
Nudo Disteso
by Amadeo Modigliani
Cariatide
by Amadeo Modigliani
Nu de profile
by Amadeo Modigliani
Nu de femme
by Amadeo Modigliani
Nudo Seduto
by Amadeo Modigliani
Studio di Nudo I
by Amadeo Modigliani
Caryatid
by Amadeo Modigliani
Nudo Seduto, 1910-11
by Amadeo Modigliani
Nu de face
by Amadeo Modigliani
Seated Nude
by Amadeo Modigliani
Caryatid
by Amadeo Modigliani
7월 12일 이탈리아 오스카나지방의 리오르노에서 출생 : 1884년 리오르노 중학교 입학. 늑막염을 앓다 : 1895년 풍경화가 미케리에게 데생과 유화를 배움. 장질환으로 폐렴에 걸림 : 1898년 폐결핵에 걸림 (-.-;) 요양을 위해 나폴리, 로마등지를 여행 : 1901년 여행중 접하게된 카마이노의 조각에서 감명을 받음 피렌체 미술학교에 입학, 조각가의 길을 걷는다 : 1902년 베네치아 미술학교 입학. 살롱 도똔느 창립 : 1903년 <Tete de Jeune Femme> : 1906년 세잔느의 회고전을 보고 감명을 받다 : 1907년 <Le Joueur de Violoncelle> : 1909년 영국 여류시인 베아트리스 헤스팅그스와 만남. 3년간 동거 : 1914년 <Portrait de Diego Rivera> <Portrait de Pablo Picasso> : 1915년 <Jacques Lipchitz et Son Epouse> : 1916년 <Portrait de Max Jacob> 잔느 에뷔테른과만남. 첫개인전에서 나체화 5점이 풍기문란죄로 철거 : 1917년 현존하는 그의 유일한 <자화상> 그림 : 1919년 1월 24일 자선병원에서 사망 : 192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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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고전미술과 철학의 전통에 뿌리를 둔 예술적이고 인간적인 품위와 강한 자긍심을 지녔던
모디. 그는 20세기 초, 다양한 미술사조가 혼재하던 유럽의 미술계에 휩쓸리지 않고 고집스럽게
자신의 독창적 예술세계를 모색했다. 모디는 조각가 브랑쿠지, 키슬링, 수틴, 피카소, 르느와르와
교제하였으며, 멕시코화가 디에고 리베라와 그의 연인 러시아 화가 말레브나 와도 친하게 지냈다.
그는 에콜드 파리의 상징적 존재로 이탈리아의 빛나는 전통을 계승하여 20세기 초 파리에서 고독한
영혼을 예술로 꽃 피웠다.
그의 작품은 탁월한 데생력을 반영하는 리드미컬하고 힘찬 선의 구성, 미묘한 색조와 중후한 마티
에르 등을 잘 표현해준다. 그의 작품은 탁월한 데생력을 반영하는 리드미컬하고 힘찬 선의 구성, 미
묘한 색조와 중후한 마티에르 등을 잘 표현해준다. 특히 그의 초상화는 모델의 개성을 빈틈없이 잡
아내면서도, 대상을 단순화하거나 보편화시키는 것이 특징이다. 아프리카의 원시조각에 영향을
받은 듯한 긴 목의 여인은 애수와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모디는 15세부터 건강상의
이유로 그가 좋아했던 조각을 하지 못하고 주위 아는 사람을 모델로 주로 초상화와 누드를 그렸다.
혹자는 모디가 미술사상 가장 잘생긴 화가라고 평하기도 하는데 특히 그의 지독히 외로워 보이는
큰 눈은 보기만해도 많은 여자들의 모성본능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미술계의 주류적 흐름과 타협하지 않는 그의 고독한 행로는 점점 더 그를 외롭게 만들어 술과 마약
에 빠져들게 하였으며, 성격 또한 점점 괴팍해져만 갔다. 그런 그에게 천국에서도 모델이 되어주겠
다는 그만의 여자, 잔느 에뷔테른이 나타났고 그녀를 만난 1917년 이후 삼 년도 안 되는 짧은 시기
동안 ‘생명의 예술’을 창조한다.
유대계 명문의 아들로 태어나, 피렌체와 베네치아의 미술학교에 다닌 뒤, 1906년 이후는 파리에서 살았다. 1908년 처음으로 앙데팡당전에 출품하였고, 다음해, 조각자 카마이노의 작품에 감명을 받았고 1909년 브랑쿠시의 권유로 조각제작을 시도하여, 니그로조각과 브랑수시식의 사실을 떠난 간결한 조형양식을 흡수 발전시킨 독자적 조각작품을 만들었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장티푸스 폐렴등 안아파본 병이 없을 정도로 건강이 좋지 못해서 1913년부턴 회화에만 전념을 하는데 그림을 그리면서 늘 조각하지 못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고 한다. 어쨋건 모딜리아니는 초기회화에서 세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07년 있었던 세잔의 회고전에서 본 세잔의 표현주의는 그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주로 초상화만을 그렸고 보통 주위의 이웃이나 지인, 창녀들을 모델로 그렸다 1910년 <<첼로를 켜는 사람>>등 6점의 유화를 앙데팡당전에 출품하였으며, 1913년 퐁마르나스로 옮겨 키슬링,수틴등과 사귀었다. 에콜 드 파리의 뛰어난 작가로서 제1차 세계대전중에 많은 걸작을 남겼는데, 탁월한 데생력을 반영하는 리드미컬하고 힘찬 선의 구성, 미묘한 색조와 중후한 마티에르 등이 특색이다 1917년, 베르트 배유화랑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다. 초기에는 풍경화도 몇 점 그렸으나, 파리로 온 후부터는 초상화와 누드화가 대부분이다 특히 긴 목을 가진 단순화된 형태의 여인상은 독특하여, 무한한 애수와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품고있으며, 보티첼리나 베네치아파의 작풍과도 이어지는 섬세하고 우아한 이탈리아적 개성을 보여준다. 시인적 자질이 풍부한 다감한 미남자로 일화가 많으며, 만년에 잔느 에뷔테른과의 사이에 딸을 두었다. 생전에는 폴 기욤, 즈보로브스키 등 일부 화상이 원조했을 뿐,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가난 속에 과음과 방랑을 일삼다가 1920년 초파리의 자선병원에서 짧은 일생을 마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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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프러스 나무와 집
"역사상 가장 잘 생긴 화가"라는 평을 듣는이탈리아
출신의 미남 화가-
열정과 사랑을 위해 생명을 불태운 비운의 화가,
Amadeo modigliani (1884년 7월 – 1920년 1월)
1884. 7. 12 이탈리아 리보르노~1920. 1. 24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의 화가·조각가.
비대칭 구도와 길쭉하게 잡아늘인 인물 및 단순하면서도 대담한 윤곽선을 특징으로 하는 그의 초상화와 누드화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작품에 속한다. 또한 이 작품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는 것으로 인기를 끌었다. 화가와 모델 사이의 말없는 공감이 보는 사람을 끌어들인다.
모딜리아니는 소매상을 하는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1895, 1898년에 늑막염과 티푸스를 앓은 뒤 통상적인 교육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그때부터 그림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902년 피렌체에 잠시 머문 뒤 베네치아로 가서 1906년 겨울까지 미술공부를 계속하다가 파리로 갔다. 그는 일찍부터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특히 시에나 유파의 그림)을 존경했고, 평생 동안 이 존경심을 잃지 않았다. 파리에서 모딜리아니는 폴 세잔의 그림에 압도당했으며, 이것은 그의 초기 작품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가 초기에 교제한 주요인물들은 앙드레 살몽, 막스 자코브 등의 시인과 파블로 피카소, 그리고 1907년에 만난 폴 알렉상드르였다. 알렉상드르는 전위 미술가들의 친구로서, 모딜리아니에게 관심을 갖고 작품을 사준 최초의 인물이었다. 1908년 모딜리아니는 앵데팡당 미술전에 5, 6점의 그림을 출품했다. 그는 또한 루마니아의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를 만나 그의 작품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그의 충고에 따라 아프리카 조각을 진지하게 연구했다. 그리고 조각가가 될 준비를 하기 위해 열심히 소묘를 했다. 또한 그는 회화적으로 모델링되어 있고 빛의 작용에 민감한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을 가짜 인상주의
라 하여 싫어했다. 그는 드로잉에서 윤곽선으로 덩어리를 제한하거나 둘러싸려고 했다. 1912년 그는 가을 살롱 전에 돌로 만든 8점의 두상을 출품했는데, 그 길쭉하고 단순화한 형태는 아프리카 조각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
모딜리아니
천재화가 모딜리아니가 병으로 운명하자 잔느는 이틀 뒤 8개월된 아이를 임신한 채 아파트에서 투신해
자살하고 만다. 우리에게는 모디의 수 많은 여성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만 회자되어오던 그녀의
이름이 세간에 알려진 건 불과 10년이 채 안 된다. 그러나 그녀의 기묘한 눈빛과 신비한 매력은 모디의
대표적인 초상화를 통해 우리에게는 이미 익숙하다. 고개를 갸우뚱하고 목이 긴 여인. 그녀가 바로 모디
초상화의 대표적인 주인공, 잔느 에뷔테른이다.
잔느는 15살의 어린 나이에 화가를 꿈꾸며 미술학교를 다니기 시작했고 옷과 장신구를 직접 디자인 할 만큼 예술적인 재능이 충만한 소녀였다. 18세의 나이에 이미 32세 모디의 예술적 재능을 인지하고 존경했던 그녀는 14세 연상의 모디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죽을 때까지 그의 예술적 동료와 연인이 되었다.
그녀에게 모디는 예술적 스승을 넘어서 삶 자체였고 그가 더 좋은 작품을 얻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던 강인한 희생정신과 성숙함을 지닌 여인이었다.
잔느를 단지 모디의 수 많은 여인 중 한 사람으로 조명하는 것으로 그치기에는 그녀의 그림에 대한 욕망과 열정이 남달랐다. 어릴 때부터 드로잉에 재능을 갖고 있던 그녀는 오빠의 권유로 가난한 예술가들의 장소 몽파르나스로 옮겨와 콜라로시 아카데미에서 그림을 공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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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에는 거친 붓 터치와 강한 색상을 사용해 주로 풍경화나 정물화 작업하는 야수파 적인 작업을 하다
가 모디를 만나면서 서로의 예술적 지향점이 유사하다는 것을 터득하고 인물화 위주의 작업으로 전환
한다. 2000년 10월 베니스에서 열렸던 몽파르나스 화가들의 그룹전시 <Modigliani and his circle>
에 처음으로 그녀의 작품이 소개되었는데, 당시 몇 점의 정물화 및 풍경화를 제외하고 대부분 생생한
성적묘사가 두드러진 셀프 누드화였다.
이는 작품 제작 당시의 예술계에서 금기시되었던 과감한 성적묘사로 부르주아 질서를 위반하는 것이었
다. 혹자는 기존의 사회적 통념이나 예술계의 정형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과감하
게 표현한 그녀의 작품에 여성주의적 도해법을 적용시킨다. 당시 남성의 시각을 통해 표현된 여성누드
의 전형적인 표현방식에 익숙했던 사람들은 여성 스스로 자신의 누드를 거침없이 표현하였다는 데 당
혹함을 느꼈을 것이다. 모디의 순종적이고 희생적인 여성으로서만 알려져 있던 그녀는 사실은 넘치는
예술적 에너지와, 자신이 선택에 대해서 후회 없이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살았던 여성이었던 것이
다. 모디를 통해 사랑에의 욕망을 채우고, 예술적 영감과 지적 자극을 얻고자 했던 그녀에게 모디의 죽
음은 결국 자신의 죽음과도 같았을 것이며 이는 어쩌면 필연적으로 그녀를 자살로 몰아갔을 것이다. 희생적이고 수동적이며 순종적이라는 나약함 때문에 그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와 영원한 사랑을 꿈꾸었던 짧은 기간의 강렬한 기억과, 또 다른 자아로서의 모디의 부재에서 오는
고통과, 영원한 그의 모델이고자 했던 욕망은 그녀의 자살을 더욱 아름답고 애잔하게 만드는 요인일
것이다. 모디가 신체적 결함과 정신적 불안정으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릴 때 그녀의 강인함과 인내력,
희생정신은 지금의 모디를 존재하게 만든 몇 점의 여인초상화를 그리는데 기여한다. 공허한 눈빛에
소용돌이치는 그녀의 욕망과 열정은 모딜리아니라는 천재화가를 탄생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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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eanne Hebuterne
Amadeo modigliani 가 그린 '잔느'의 초상화들
Jeanne Hebuterne (1917-8)
1917년 7월 어느 날 그는 가난 속에 과음과 방랑을 일삼다가 몽파르나스의 로톤드(카페 이름)에서 눈동자도 머리 빛도 밝고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를 가진 잔느를 만나게 되었다. 이 숙명의 여인은 그 때 갓 열아홉 살이었고, 모딜리아니는 서른세 살이었다. 잔느는 그 동안 모딜리아니가 만난 모든 여인 중 가장 믿을 수 있고 헌신적이며 가장 순정적인 여자였다.
[그림]Amedeo Modigliani ◈ Portrait of Jeanne Hebuterne (1917)
한 모델을 대상으로 여러 점의 작품을 남겨 우리에게 친숙하게 알려진 모딜리아니 평생을 모딜리아니의 곁에서 모델이 된 여인은 이 작품의 주인공인 그의 아내 쟌느
모딜리아니의 부모는 유태인으로 스스로 유태인임을 자랑스러워 했고 잔느의 집안은 독실한 카톨릭 집안이었다. 사랑했으나 부모들의 반대로 결혼식도 올리지 못한채 잔느는 사랑하는 그를 따랐다.
[그림]Amedeo Modigliani ◈ Portrait of Jeane Hebuterne, Left Arm behind Head (1919)
20세기 초엽 인상주의 물결이 휩쓸던 유럽에는 많은 화가들이 파리에 모여들었다. 새로운 시각이 고정된 형태나 관념을 탈피해 다양한 형태(양식)로 시도되는 시기였다. 고전적인 초상화의 틀에서 벗어나 왜곡된 얼굴의 형태(유달리 길다란 목과 얼굴)속에서도 우수에 찬 표정에 담겨져 있는 인물의 심성을 반영하는데 조금도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파리의 몽마르뜨나 몽파르나스지역에 모여 활동하던 `에콜 드 파리(Ecole de paris: 파리파) 사이에서도 로맨티스트로 유명했던 모딜리아니를 사랑했던 쟌느는 `얼굴이 길어 슬픈 여인' 이라는 그만의 캐릭터를 완성시키는 원천이 되었다.
이러한 목이 길쭉한 인물 스타일은 아프리카 원시 조각이나 모딜리아니가 활동하던 시기에 유럽에서 유행한 일본의 우끼요에서 영향을 받고, 세잔느와 입체주의가 가미된 그만의 독특한 양식으로 자리잡았다.
[그림]Amedeo Modigliani ◈ Little Girl in Blue (1918)
이 작품은 모딜리아니와 쟌느 사이에 여자 아이가 생기기 얼마 전에 그려진 것이다. 웨르나의 해석에 의하면 모딜리아니는 몽파르나스의 이웃에 살고 있는 하층 계급의 어린이들을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아이들을 많이 그렸으며 이것은 그 가운데의 하나이다.
이 꼬마아이는 고운 옷을 입고 있는데, 아마 단벌 옷일 것이다. 소녀의 얼굴은 밝지도 쾌활하지도 않다.그녀의 표정은 훨씬 연상의 다른 모델들의 경우처럼 쓸쓸하고 체념마저 하고 있다.
모딜리아니가 그린 어린이들의 그림은 참다운 자애의 감정을 불러일으켜 주고 있다. 이 소녀는 천진 무구하지만 애처로움이 소리 없이 흐르고 있는 화면을 통해 우리는 모딜리아니의 진심을 엿볼 수 있으며, 깊은 애정을 함께 느낀다
[그림]Amedeo Modigliani(伊,1884-1920)◈ The Servant Girl (La jeune bonne,1918)
파리라는 도회지로 나온 시골 처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녀라는 직업이며, 이런한 유형은 동. 서가 같다. 하루 종일 허름한 옷차림으로 근면하게 일 해야만 되는게 이들의 인생이었다.
특히 유럽인들의 사람 씀씀이는 고약할 정도로 가차 없고 지독하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일들, 어린애를 돌보고 주부의 잔심부름을 도맡고 하는 것을 묵묵히 감당해 낸다. 이들을 프랑스 말로 본느라고 부른다.
인생의 뒤안길에서 살고 있는 애환의 표정들 모딜리아니는 이러한 이웃을 사랑했고 그가 즐겨 그린 서민의 한 표정을 그녀는 대표하고 있다. 이 모델은 카뉴슐멜 출신이며, 마리훼레라는 이름의 처녀였다.그녀의 아버지는 농부였으며, 이 젊은 처녀의 삶을 모딜리아니는 공감했고 그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림]Amedeo Modigliani(伊,1884-1920)◈ Portrait of Jeanne Hebuterne (1919)
이그림은 2004년 소더비경매에서 3130만달러(347억6000만원)가 넘는 가격에 익명의 입찰자에게 팔렸다.
... 너의 영혼을 알게될때 눈동자를 그릴 수 있어..
1919년 무렵 모딜리아니는 파리에서 화가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잔느는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좋아진 상황과 한 아이의 아버지라는 처지에도 불구하고, 모딜리아니는 작품에 대한 열정과 끝없는 음주벽을 놓지 못했다.
모딜리아니의 그림 <잔느 에뷔테른느>(1919년작)는 이때에 그려진 것이다. 임신한 잔느의 모습은 왠지 처연하다. 그 눈동자 없는 눈은 그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담아 슬프게 바라보고 있는 듯 하다.
사진의 인물작품에서 눈동자를 표현하지 않은 점은 매우 특이한데 오히려 푸른색만으로 표현한 눈의 표정은 모든 것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영원으로의 응시 같은 느낌을 자아낸다.
Nazareth ◈ Love Hurts
모딜리아니는 지중해 문화권에 속하는 유태인 가정에서 1884년 7월 24일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 리브른느는 피렌체 남쪽의 포구였다. 소학교 시절의 모딜리아니는 성적은 보잘것 없었지만 그림을 잘 그렸고 어렸을 때는 잔병치레에 폐결핵까지 앓았다. 이 때에 앓은 결핵이 파리의 보헤미안 시절에 재발하여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본격적인 미술수업은 1898년 리브른느에 있는 미술 아카데미에 들어가 풍경화, 정물화, 누드화를 배우는 것으로 시작됐다. 누드화에 특히 재능을 보인 그는 1902년 5월 7일 피렌체에 가서 아예 스콜라 디누도(누드학교)에 등록했다. 여기서 그는 누드화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의 토대를 마련하는 한편 보티첼리와 미켈란젤로, 마르미지아노의 그림에 심취했다.
1903년 3월에 모디는 베니스로 옮겨 같은 계통의 학교에 입학했다. 여기서 유명한 미래파의 아르덴고 소피치와 움베르도 보치오니 같은 동료화가도 만났다.
남쪽의 태양과 예술을 찾아 온 북구의 처녀들을 사귀면서 젊은 카사노바 같은 절제 없는 생활도 향유했다. 후에 베니스에서 배운 습성, 티치아노와 지오르지오네의 나체화들이 그의 삶과 작품에 큰 영향을 준다.
1905년 돈을 대주던 외삼촌 아메데오 가르씨니가 죽자, 모딜리아니는 현대화의 메카인 파리로 향한다. 몽마르트에서의 모딜리아니의 삶은 보헤미안 그 자체였다.
[그림]Amedeo Modigliani ◈ Nude with Hat (1907-8)
돈이 없는 데다 그림마저 팔리지 않아 호텔에서나 하숙집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그림을 전당잡히다 번번히 쫓겨났으며, 때로는 몰래 빠져나가 집을 옮기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 때의 그림은 희귀하다. 파리에서의 삶은 외로움과 고단함의 연속이었다. 멕시코에서 온 리베라, 소련에서 온 수틴, 자크 립시츠, 키슬링, 막스 자콥과 주로 어울려 다녔다. 캔버스 살 돈이 없어 캔버스의 앞과 뒤 양면에 그림을 그리고 물감도 절약했던 때였다.
1908년에 완성한 Nude with Hat는 절망과 불안, 성적 충동과 갈망으로 초조한 화가의 심리를 잘 묘사하고 있다.
[그림]Amedeo Modigliani ◈ Blonde Nude (1917)
수많은 여성들이 그의 삶 속에서 명멸해 갔다. 모딜리아니에게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하룻밤의 고독과 자살 충동을 이기기 위해 소모품처럼 써버린 많은 요정들이 그의 예술혼과 끈끈하게 관계되어 있었다. 대개의 그 여성들은 그의 작품 안에서 익명으로 존재하며 과장된 풍만함으로 여성성의 일부만을 강조해 표현되어 있다.
모딜리아니의 다른 나부와는 달리 이 서 있는 알몸의 여성은 잔잔한 정감이 마치 여울물의 흐름같은 파문의 무늬로 숨쉬는 것만 같다. 모딜리아니에게 있어서 여자의 나체란 단도 직입적인 관능의 외모도 아니며 여러 가지 기복으로 무겁게 덩어리짓는 복잡한 조형도 아니며 그것을 통해서 감지하게 되는 생의 풍요 혹은 그 찬미였는지도 모른다.
[그림]Amedeo Modigliani ◈ Madame Pompador (1915)
이그림은 실제 퐁파두르 부인을 모델로 해서 그린 게 아니라 모딜리아니와 동거했던 (1914~16) 베아트리체를 그린 것이다. 영국 여성인 베아트리체가 몽파르나스에 나타난 건 제1차 대전이 발발하던 해였으며, 사람들은 그녀를 런던의 시인이라고 불렀다.
결코 미인은 아니었지만 모딜리아니의 진가를 발견하고 그의 천재성을 개화시킨 숨은 공로자이다. 모딜리아니보다 5살이나 연상인 그녀는 그의 사기를 잘 참아 주었다고 한다.
그가 광분하면, "모딜리아니, 명심해요, 당신은 신사라는 걸. 당신의 어머니는 상류 사회의 부인이라는 것을 ."하며 타일렀으며, 이 말은 주문처럼 모딜리아니의 광기를 가라앉혔다고 한다. 그럴듯하게 모자를 쓰고 마치 귀족처럼 차린 이 그림을 퐁파두르 부인이라고 명명한 것은 이들의 사랑이 무르익을 무렵의 정경을 암시하는 것도 같다.
[그림]Amedeo Modigliani ◈ Portrait of Beatrice Hastings (1916)
첫번째 연인 베아트리체와 헤어진 1916년과 부인 잔느 에뷰테른을 만나게 되는 1917년 사이에 모딜리아니는 그의 걸작 누드화에 나오는 많은 모델들을 만난다. 그의 새 모델들은 가수와 댄서, 젖짜는 시골 처녀들 같은 건강한 여인들이었다. 이미 건강을 잃고 죽음에 다가가던 그는 건강과 생기가 넘치는 젊은 육체의 윤기와 탄력성과 매력을 흠모하면서 누드를 그렸음데 틀림없다. 여하튼 이 때에 그린 누드는 미술사상 걸작들에 속하는 작품들이다.
[그림]Amedeo Modigliani(伊,1884-1920)◈ Seated Nude (1917)
Seated Nude는 잔을 소재로 한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대개의 모딜리아니 그림에서 나타나는 사람들의 표정은 단아하고 깊은 우수에 찬 눈을 갖고 있다. 이 그림에서도 예외없이 아름답지만 슬픈 그녀의 표정을 우리는 놓칠 수 없다. 앙다문 입에서조차 의지를 읽기보다는 세상을 관조하며 마주앉은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그녀의 깊은 눈으로 인해
* 그들의 이야기
천재화가 모딜리아니와 그의 작품을 아는 많은 사람들은 그와 그의 연인들, 특히 비극적 사랑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잔느 에뷔테른과의 관계를 둘러싼 수 많은 에피소들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왔다. 이로인해 픽션으로 밝혀진 일화들 조차도 수 년간 여러 이야기들로 미화
된채 회자되면서 이제는 사실과 거짓의 경계가 모호해진 채 영화속 연인처럼 살다간 비운의 주인공
으로 포장되어 다양한 텍스트들속에서 수 많은 인용구들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의 욕망은 그들의 이야기를 보다 더 애절하게 만들어 그들의 사랑을 이 시대 마지막 비극
적 로맨스로 기억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심과 지속적인 사랑이 만들어낸 거짓 일화들
속에도 실제로 그들의 삶이 소설 속 주인공처럼 느껴질 만한 운명적인 일화들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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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살의 나이에 이미 화가의 꿈을 지녔던 어린 잔느는 몽파르나스의 가난한 예술가들과 교우하며, 때론
그들의 모델이 되어주며 미술학교를 다녔다. 수업후에 잔느는 카페 로통드에 자주 들르곤 했는데, 어느
날 깔끔한 코듀로이와 붉은 스카프를 두른 이탈리아 화가 모딜리아니를 우연히 마주하게 된다. 물론
모딜리아니는 그녀를 인식하지 못했지만 잔느의 기억속에 그는 이미 ‘잔느 타입’의 어떤 사람이었던
것이다. 1917년 어느 조각가에 의해 둘이 본격적으로 소개를 받기 전까지 잔느에게 있어 모딜리아니는
그녀의 주변을 맴돌며, 공원에서나, 카페에서나, 여러 번 마주치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마치 우리가 항상 알고지낸것만 같아..우린 정말 닮았어…”
1917년 봄, 조각가 Chana Orloff는 어느날 화가들의 모임에서 모딜리아니에게 잔느를 소개한다.
잔느를 처음 본 순간 모딜리아니는 어떤 전율같은 것을 느꼈고, 그녀의 유난히 조숙한 모습과 반항기,
정의할 수 없는 기묘한 눈에 매료되었다고 한 지인에게 전했다.
1916년 몽파르나스에서의 가난했던 시절, 그의 열렬한 후원가였던 즈보로프스키는 그랑쇼미엘 8가에
있는 빌딩 꼭대기에 모디와 잔느의 작업실을 내어준다. 1917년에서 2년간 잔느는 수업이 끝나면 작업
실에서 그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물론 이때도 그의 여성편력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또
다른 여인들을 모델로 삼아 작업실로 끌어들였으며, 여전히 친구들과 술자리를 즐겨했다. 그러나 그가
다른 여성들과 맺는 관계에 대해서도 잔느는 크게 흥분하거나 화를내지 않았다. 그에게 타모델들과 맺
는 관계는 예술적 영감으로서 불가피한 것이라고 이해했고, 그것을 통해 그의 그림이 세간에 알려지게
되기를 보다 더 바랬기 때문이었다.
어릴때부터 폐결핵을 앓던 그의 병세가 점점 악화되자 즈보로프스키의 권유로 둘은 니스해변가로 요양
을 가게된다. 거기에서 본격적으로 둘만의 시간을 갖게 되었으며, 이 시기 모딜리아니의 대표적인 초상
화들이 가장 많이 탄생한다. 모딜리아니와 잔느의 딸 잔느 모딜리아니가 태어난 것도 니스에서였으며,
목이 긴 여인으로 유명한 몇 점의 초상화들을 제작해 잔느에 대한 그의 애정이 남달랐음을 보여주는 곳
도 니스였다. 그러나 그들의 행복도 잠시, 아이가 태어나고 생활고에 쫓기던 모딜리아니는 또 다시 방탕
한 삶에 빠졌고, 성격도 점점 괴팍해져갔다. 결국 2년이 채 못되어 다시 파리로 돌아와야했고, 이때 이
미 그의 건강상태는 극도로 악화되어었다. 돌이킬수 없는 건강 때문에 불안함과 분노 사이를 오갔던 그
의 정신상태는 잔느에게도 불안함을 안겨준다. 도와주는 이도 별로 없고 재정적인 지원도 전무한 상태
여서 별달리 치료할 방법을 찾지 못했던 그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다시피 도움을 요청했다.
그가 취중에 난동을 부리기라도 하면 경찰서에서 그를 찾아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겨우 몇 명의 도움으로 그가 입원해 있을 때 인근 여관에서 숙박하던 잔느는 베개밑에 면도칼을 두고 잠들었다고 한다. 가올 그의 죽음에 대해 그녀 역시 조금씩 죽음을 준비했던 것이다. 이때 그녀는 스스로 자살하는 그림을 그리는 등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하고 병약했던 상태였다. 병원에 실려간 모딜리아니는 입원 3일 후 사망한다. 사인은 결핵형 늑막염이었다.
그리고 근 이틀이 지난 1920년 1월 26일 새벽, 잔느는 가족과 함께 머물던 아파트 5층에서 창문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그때 그녀는 8개월된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충격에 휩싸인 잔느의 가족들은 모딜리아니와 잔느의 관계를 부정하고 원망하면서 둘의 시신이 함께 묻히는 것을 반대한다. 그러나 수 많은 지인들의 요청으로 10년 뒤 결국 모딜리아니가 묻힌 페르라셰
즈 묘지에 잔느의 시신을 뉘일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의 지독한 사랑과 욕망, 그림에 대한 열정은 수 많은 지인들에게 회자되고, 그들의 추억이 되어, 여전히 시대와 지역을 뛰어넘어 수 많은 사람들에게 ‘화가와 여인’의 대표적인 사례로 전해져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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