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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0년을 달려온 손기정, 그는 지금도 뛰고 있다
    ◆추억의이슈/┗⌒스포츠 2012. 12. 23. 18:38

     

     

          손기정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 실제 동영상

     

    대한민국은 맨발로 달리고 맨손으로 싸웠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나라마저 빼앗겼던 시절에도 대한민국은 포기하지 않고 독립을 위해 뛰었고, 근대화를 향해 달렸습니다. 고(故) 손기정 선생의 뜀박질도 그러했습니다.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마음에 태극기를 품었던 사나이의 질주는 단순한 마라톤이 아니었습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스포츠 스타인 그의 발자취는 우리 민족의 고통인 동시에 희망이었습니다. 손기정 선생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육상연맹을 지원하고 있는 삼성스포츠단은 그의 뒷모습을 따라 함께 뛰었습니다. "내 인생의 마라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손기정 선생의 유훈을 받들고자 다큐멘터리 '100년을 달려온 손기정, 그는 지금도 뛰고 있다'를 연재합니다.

    "아, 대단합니다. 일본의 손 기테이 선수, 가장 먼저 결승선을 향해 달려옵니다. 세계 1위, 세계 1위, 세계 1위입니다. 대단합니다. 세계 1위입니다."

    ▶ 결승선 통과 중계 일본어 듣기

    일본 아나운서는 숨이 넘어갈 것처럼 소리쳤다. 일장기를 가슴에 단 선수가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마라톤 금메달을 향해 뛰고 있었다. 그는 "일본의 손 기테이" "우리의 손 기테이"라고 목이 터져라 외쳤다.

    "일본 대표 손이 가장 먼저 달려옵니다. 한국의 대학생이 세계의 건각들을 물리쳤습니다. 아시아의 힘과 에너지로 뛰고 있습니다. 뜨거운 태양의 열기를 뚫고, 거리의 딱딱한 돌 위를 달렸습니다. 우승자 손이 결승선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 결승선 통과 중계 독일어 듣기

    같은 시간, 독일 아나운서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올림픽의 꽃이라는 마라톤에서 무명의 아시아 선수가 1위로 골인하는 모습을 직접 보고도 믿지 못한 것이다. 세계가 깜짝 놀랄 장면이었다.

    독일 아나운서는 손기정을 알고 있었다. 그가 일본 대표이지만 한국인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베를린에는 한국인 교포가 10여 명에 불과했는데 누가, 어떻게 독일 아나운서에게 손기정을 소개했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다. 이 녹취 자료는 독일역사박물관 독일방송기록보관실에 남아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당시 역주하는 손기정]



    1936년 8월9일 오후 5시가 조금 넘은 시간. 마라톤 경기를 보기 위해 베를린 스타디움을 가득 메운 관중 10만 명이 일제히 흥분하기 시작했다. 42km를 달려 스타디움에 가장 먼저 도착한 선수는 손기정이었다. 5km에 달하는 오르막길과 섭씨 30도를 넘는 무더위를 뚫고, 여러 선수가 탈진해 기권한 지옥의 레이스에서 깡마른 아시아 선수가 결승선을 향해 가장 빨리 뛰고 있었다. 충격과 경외에 휩싸인 관중은 뜨거운 함성을 토해냈다. 마지막 100m 스퍼트 때 응원은 더 커졌다. 2시간29분 동안 42km를 지나온 마라토너는 골인지점을 앞두고 더 빨라졌기 때문이다. 손기정은 마치 스프린터처럼 마지막 100m를 12초에 달렸다. 2위 어니스트 하퍼(영국)보다 2분 정도 빨랐는데도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오직 앞만 보고 세상 끝까지 달릴 것처럼 전력으로 질주했다. 올림픽 사상 최초로 2시간30분의 벽이 깨졌다. 손기정은 2시간29분19초로 올림픽 신기록을 세웠다.

    독일은, 아니 전세계는 올림픽 챔피언, 마라톤 영웅의 탄생을 기뻐했다. 유럽인들은 일본의 무명 선수가 일본 대회에서 비공인 세계신기록을 세웠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그를 세계 최고로 인정하지 않았다. 올림픽에서 같은 조건으로 뛴다면 금메달을 따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손기정은 세계인들 앞에서 세계를 향해 뛰었다. 보고도 믿기 힘든 기량과 정신력을 증명하며 올림픽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베를린 스타디움에서 우승을 기뻐하지 않는 단 한 사람이 손기정이었다. 가슴에 달린 일장기 때문이다. 한국인인 그는 일본 대표로 올림픽에 참가했기 때문에 손기정이 아닌 손 기테이(kitei)로 소개됐다. 죽어라 뛰어서 이뤄낸 우승이 손기정의 것이 아닌 손 기테이의 몫이라는 사실, 한국의 것이 아닌 일본의 몫이라는 사실이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42.195km 코스를 완주한 손기정 앞에는 마라톤보다 더 험난한 레이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손기정은 훗날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한 번도 일본을 위해 뛰어본 적이 없다. 나와 내 나라, 조선을 위해 뛰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나의 우승은 나라를 빼앗긴 슬픔, 빼앗긴 땅에서 태어난 절망만을 더욱 절실하게 되새겨줄 뿐이다."

    손기정은 이기기 위해 뛰었지만 승리를 기뻐할 수 없었다. 나라를 잃고, 그래서 자아도 잃은 조선인의 현실은 그렇게 답답했다. 곧이어 올림픽 챔피언을 위한 시상식이 열렸다. 손기정은 2위 하퍼, 3위 남승용과 함께 시상대로 올랐다. 그가 시상대 가장 높은 곳 금메달리스트의 자리에 오르자 '기미가요'가 흘렀고, 일장기가 게양됐다. 히틀러 총통을 비롯한 귀빈들과 관중들이 손기정을 향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그럴수록 그는 움츠러들었고 슬픔에 빠졌다. 마라톤 영웅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월계수 화분으로 유니폼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가렸다. 웃음기 하나 없었을 뿐 아니라, 죄인처럼 그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현지인 눈으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동아일보의 '사라진 일장기']



    손기정 우승 후 16일이 지나 이른바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이 터졌다. 8월25일자 동아일보는 일본 주간지 '아사히 그라프'에 게재된 손기정 사진에서 유니폼의 일장기를 지워 신문에 실었다. 사건에 관여한 기자들이 모진 고초를 겪었고, 동아일보는 무기 정간조치를 당했다. 이 엄청난 사건으로 인해 손기정에 대한 경계와 감시가 더 심해진 것도 물론이었다.

    사건이 일어나기 이틀 전, 동아일보 체육기자 이길용은 '아사히 그라프'에 실린 손기정의 사진을 보고 비통함을 느꼈다. 사진 밑에는 '우리들의 손기정'이라는 설명이 달려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우리는 조선이 아닌 일본이었다. 이길용은 편집기자 장용서와 상의해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신문에 싣기로 했다. 원본 사진의 일장기 부분을 청산가리 용액으로 지웠다. 조선총독부에 배달하는 1판에는 사진 원판을 그대로 싣고, 2판부터 일장기가 삭제된 사진을 게재했다. 그러나 말소된 일장기 사진은 조선총독부의 눈을 피하지 못했다. 이 사진을 계기로 한국의 독립 이념과 기개가 다시 살아날까 두려워했던 조선총독부는 이길용을 비롯해 기자 5명을 40여 일 동안 모질게 고문했고, 언론계에서 영구 추방을 당했으며, 동아일보는 279일간의 무기정간을 당했다.

    손기정의 질주는 기적이었다. 세계를 놀라게 한 그의 저력은 한민족에게 커다란 자랑이었다. 일본의 제국주의는 세계 최고의 마라토너 손기정을, 그의 업적을 갖고 싶었다. 손기정은 당연히 일본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평생 동안 끝나지 않았던 손기정의 고뇌는 여기서 시작됐다. 올림픽 공식기록에는 손기정의 국적이 일본으로 돼있다. 그러나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역대 마라톤 우승자 기념비 등 일부 사료에는 손기정의 국적을 한국으로 표기하고 있기도 하다. 그는 평생 일본과 조선의 경계에서 계속 달리고 있었다.

    일본이 가장 일장기를 달게 하고 싶었던 조선인이 바로 손기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일장기를 달고 있을 때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저항이었다. 훗날 손기정은 말했다. "조국 땅에서 구김살 없이 달릴 수 있는 젊은이는 행복하다. 그들이 달리는 것을 누가 막겠는가?"

    [손기정 연보]



    [1933년 경영마라톤 대회 당시 역주하는 손기정]



    [손기정이 사용하던 모래주머니 및 신발 사진]



    [양정고보 당시 손기정]



    [금메달 시상대에서 고개를 떨구고 있는 손기정]



    [1936 베를린 올림픽 당신 손기정이 지인에게 보낸 엽서]



    [1936 베를린 올림픽 입국 직후의 손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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