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향시(프랑스 작곡가로는 최초로 이 장르의 곡을 썼음)와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 Samson et Dalila〉 등으로 유명하다.
프랑스 음악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고, 재능있는 피아니스트 겸 오르간 연주자였으며,
비평·시·수필·희곡을 쓰기도 했다.
협주곡과 교향곡은 리스트의 양식을 프랑스의 전통적인 화성과 형식으로 옮긴 것으로
교향곡 3번이 자주 연주된다.
피아노의 신동이었던 그는 1846년 최초의 리사이틀을 가졌으며,
파리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오르간을 공부했고, 1855년 교향곡 1번이 초연되었다.
1857년 유명한 파리의 마들렌 교회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고 20년 이상 이 직위를 지냈다.
이무렵 프란츠 리스트를 만나게 되어 지속적인 친교를 맺었으며,
그로부터 세계 최고의 오르간 연주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1861~65년에 니데르메이어 학교의 피아노 교수가 되었고,
가브리엘 포레와 앙드레 메사제같은 제자를 키웠다.
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후 프랑스 국민음악협회를 창시하는 데 앞장섰는데,
이 단체가 다음 세대의 프랑스 작곡가들의
중요한 관현악 작품을 연주하게 촉진하는 역할을 했다.
그해 최초의 교향시 〈옹팔의 물레 Le Rouet d'Omphale〉가 작곡되었는데,
이 작품은 〈죽음의 춤 Danse Macabre〉과 함께
그의 교향시 4곡 가운데 가장 자주 연주되는 작품이다.
〈삼손과 데릴라〉는 성서 인물을 편향되게 그렸다는 이유 때문에
파리에서의 공연이 거부되어, 리스트의 주선으로
1877년 바이마르에서 독일어로 초연되었다.
이 작품은 1890년에야 파리 에댕 극장에서 공연될 수 있었고,
후에는 그의 가장 인기 있는 오페라가 되었다.
1878년 생 상스는 아들을 잃었으며 3년 후에는 부인과도 이혼했다.
이후 몇 년 간 그는 유럽 전지역과 미국·남아메리카·중동·동아시아 지역을 계속 여행하며,
자신의 5곡의 피아노 협주곡, 그외의 건반음악, 교향시들을 연주하고 지휘했다.
피아니스트로서도 그는 바그너로부터 화려한 기교의 소유자로 인정을 받았으며,
마르셀 프루스트의 연구대상이 되기도 했다.
1880년 무렵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극음악과 기악음악 분야에서 많은 작품을 쏟아냈다.
교향곡 3번(1886)은 리스트를 추모하면서 그에게 헌정한 것으로
오르간과 2대의 피아노를 능숙하게 사용하고 있다.
같은 해 소규모 관현악단을 위한 〈동물의 사육제 Carnaval des Animaux〉를 썼다.
이 작품은 유머러스한 환상곡으로 생전에는 연주되지 못했으나
죽은 뒤 젊은이들의 연주회용 작품으로 커다란 인기를 얻게 되었다.
후기의 작품 가운데 최고의 걸작은 피아노 협주곡 5번(1895)과 첼로 협주곡 2번(1902)이다.
그가 살았던 시절은 바그너가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던 시절이었으나,
그는 별 영향을 받지 않고 고전적 모델을 고수했으며,
세련된 장인정신과 형식감을 강조하는 프랑스 음악의 전통적 관념을 견지했다.
겸손하지만 풍자적인 문체를 보이는 그의 글과 일기는 당대의 음악 실상을 그리고 있다.